이를「가족」이라 한다
응원하며 보듬어가는 역할극 속
가족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족에서 다시 시작하자
서울남부청소년비행예방센터는 비행위험 초기단계의 청소년들이 재판을 앞두고 교육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다. 개청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교육생의 부모 등 보호자를 교육해왔다. 일반적으로 보호자와 교육생은 분리되어 교육을 받았고, 보호자교육은 주로 청소년기 자녀의 이해, 비폭력 대화법 배우기 등 자녀 지도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대개 강사는 일방적으로 보호자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거나 대화기법을 연습해보도록 하였고 보호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즈음 이러한 지식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어서 유튜브만 접속해도 더 훌륭한 강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아쉬움이 있었다.
단순한 강의와는 차별된, 화려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색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참여하며 의미있는 활동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형 교육인 '가족교실 역할극'이 도입된 배경이다.
자녀의 '사춘기 비행'으로, 서로 가장 가까우면서 동시에 일상 속 타자로서 침묵이 이어지며 멀어져만 가던 부모와 교육생의 왜곡된 관계를 해소하고, 서로의 마음 속 목소리를 교환하며 경청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서울남부청소년비행예방센터에서 하는 역할극은 아주 대단하거나 심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이 아닌 가족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특별한 의미를 남기는 것 같다. 역할극 전문가는 먼저 몇 가지 게임으로 참여자들의 긴장된 마음을 풀게 하고 참여한 가족들을 여러 모둠으로 나눈다.
각 모둠에서는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즐거웠던 일 등 그날의 주제에 따라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그 중 한 사건을 모둠의 연극 시나리오로 발전시킨다. 자녀와 부모가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의식과 경험을 나누면서 자녀의 시각과 부모의 시각을 진지하게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데, 이것만으로도 왜곡되어 치닫던 생각들이 정리가 된다.
다음으로 시나리오에 따라 역할을 정하고 관객 앞에서 연극을 진행하는데, 참여자들은 과거 혹은 현재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편린,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했던 흔적의 이유와 그 지속 가능성 등을 꿈꿔본다. 그러면서 참여자들은 '나에게만 일어났던 아주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경험들이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거나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것이 아닌 어느 가족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건임을 인지하며 여유를 갖게 된다.
마치 팽팽하게 곧 터져버릴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풍선에서 갈등의 바람이 조금은 새어나가 말랑거리는 고무풍선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때로는 역할극을 통해 가족들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좋았던 날들'을 회상하기도 한다. 함께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으며 웃었던 추억을 소환하며 '그 때 좋았잖아. 다시 그럴 수 있어, 소소한 행복을 만들자'라며 용기를 내어 회복의 방향으로 한걸음 내딛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한 걸음 더 가까이
이슬비(가명) 교육생은 초등학교 때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가족 해체과정을 겪었다. 이후 세 가족이 처음으로 함께 모인 곳이 서울남부청소년비행예방센터의 '가족교실' 이었다. 교육생은 직접 겪은 가족의 해체 상황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용기 있게 다른 참여자들 앞에 나섰다. 슬비는 부모에게 표현하지 못했지만, 부모가 싸울 때마다 느꼈던 두려움과 마음의 고통을 역할극에서 드러냈다.부모들은 이혼 과정에서 부부의 감정에 집중하느라 자녀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서는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점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슬비는 역할극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와 끌어안으며 상처를 봉합하는 면모를 보여 청중의 진심어린 박수를 받아 격려와 응원을 얻었다.
역할극을 마친 슬비는 "저에게 실제 있었던 일이었어요. 부모님들이 싸우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안 좋게 남았던 것들이 해소되는 느낌이었어요."라고 소감을 밝혔다. 가족 교실 후 부부는 여전히 이혼상태 이지만, 아픔을 표현하고 이를 수용해주는 경험은 부모가 자녀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귀중한 화해의 자리가 되었다.
학교 폭력에 연루되어 외국으로 강제 유학을 다녀왔던 명승주(가명) 교육생은 역할극 활동 초반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부모 그리고 다른 가족들과 함께 역할극을 진행하면서 몰입하였고, 부모의 울음을 통해 서로 좀 더 이해하고 한 걸음 거리가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였다.
역할극을 마친 승주는 "처음에 이것이 나와 무슨 관련이 있을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듣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저에게 표현을 안 하셨지만,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가족마다 다양한 사례들이 있지만, 역할극에 참여한 부모와 자녀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우리 엄마에게, 우리 아빠에게, 우리 자녀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서로의 속마음을 알았다,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 좋았다'는 것이다. 자녀의 문제행동과 반복되는 갈등으로 멀어져만 갔던 관계들,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방치해 둔 관계들이 가족교실을 통해 가까워졌고 '다시 한번 잘해 보자'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야
역할극을 할 때마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가족교실이 보호자의 자율적 참여로 이루어지다 보니 직장 문제로 보호자가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다. 담당교사로서 교육생을 별도의 장소로 분리하여 다른 교육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육생이 참여 의지를 보일 경우 담당교사와 전문강사가 가족이 되어 역할극을 수행할 때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결성된 일회적인 대안 가족과도 같다.혼자 참석한 송승일(가명, 남) 교육생은 역할극이 끝난 후 "우리 엄마는 참가하지 않았어요. 엄마와 같이 온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엄마는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울컥했지만 괜찮았고, 대신 함께 해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족교실이 굳이 혈연가족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경험이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다른 콘텐츠에 빠져들어 마음이 이어지기 힘든 요즈음이다. 가족이 눈 맞춤을 하며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경험과 느낌, 다짐을 나눌 수 있는 역할극에 참여하는 것은, 백만 불짜리 강의보다 더 큰 울림이 있는 특별한 교육이 되었다.